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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역사 - 22 에르메스 (Hermes)

by Randy_Rhoads 201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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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독일 태생의 티에리 에르메스가 파리의 마드레인 광장의 바스 듀 름파르(Rue Basse-du-Rempart)로에서 마구상을 시작한 것이 에르메스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티에르는 당시 교통수단인 마차를 끄는 말에 필요한 용구, 안장, 장식품을 직접 수공으로 제작했으며, 1867년 세계 박람회에서 1등 메달을 받음으로써 에르메스 마구제품의 섬세함과 튼튼함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78년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선친의 일을 계승하였고, 새로운 사업들을 창출해내며 기존의 가죽제품 위주의 생산에서 부티크 사업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에르메스의 사업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는데, 각국의 정·재계 유명인사와 전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사람들이 에르메스의 고객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 윈저 공작 부부,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잉그리드 버그만, 재키 케네디와 같은 사람들이 에르메스의 단골 고객이었다.

자동차의 출현으로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해가는 사회흐름에 따라 에르메스사는 고품질의 가죽 제품외에 현대적 여행 스타일에 걸맞는 소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곧 패션, 장신구, 식탁용 은제품, 다이어리 및 실크 스카프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1929년 뉴욕에 첫 부띠끄를 오픈하면서 에르메스는 국제적인 브랜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향수, 타이, 맞춤복 및 기성복, 비치 타올, 에나멜 장신구, 그리고 여성 및 남성복에 이르는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며 미국, 서부 유럽, 태평양 연안 등 전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뻗쳐나갔다.

1978년 그룹의 회장으로 선출된 장 루이 뒤마는 시계 및 식탁 장식 용품 등 새로운 라인을 도입했다. 또 아시아와 호주까지 매장을 확대했다. 에르메스사는 현재 전세계에 2백50여개 부티크를 운영중이며 약4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연간 매출이 50억 프랑스프랑에 달하는 국제적 그룹으로 성장했지만 말과 마구로 상징되는 인간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에르메스의 정신으로 지켜지고 있다.


현재 에르메스는 마르땡 마르지엘라가 여성복 디자이너로 영입된 이후 과거의 수공제품에서 보여줬던 최고의 장인정신이 깃든 가죽제품이나 화려한 패턴의 스카프 뿐만이 아니라 매년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남녀 의상에 있어서도 에르메스 고유의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실루엣의 의상 제품을 선보이며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최고의 명성에 걸맞는 브랜드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97년 지사를 설립,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동 명품관과 신라호텔 아케이드에서 영업중이며 2000년 현재 한국의 High Class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브랜드로 샤넬과 함께 에르메스가 꼽힐정도로 한국내에서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 브랜드이다.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의 가죽이 뛰어난 이유는 에르메스가 다른 업체보다 우선적으로 가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가죽공급업자들이 갖고 있는 상품의 상위 10%를 선택하게 되는데 에르메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이유는 에르메스의 높은 구매 가격과 현금결제 때문이다.

악어가죽의 경우 호주의 특정 악어 농장으로부터 공급을 받는데 싸움을 많이 하는 악어의 가죽은 스크래치가 많고 피부조직이 고르지 않아 선호하지 않는다. 켈리 백은 악어의 배 부분 가죽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방 하나를 만들기 위해 두, 세장의 악어가죽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에르메스가 원하는 요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구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한 해 동안 악어가죽 제품이 생산되지 않을 때도 있다. 소가죽의 경우 균형감을 위해 양면이 균일한 등뼈를 중심으로 커팅된 가죽을 사용한다.

결국 한 개의 가방에 한 마리 소의 가죽이 사용되는 셈이다. 이렇게 선택된 가죽들은 에르메스 가죽 아뜰리에로 옮겨져 또 한 번의 품질 검사를 받게 된다. 견고성 측정을 거쳐 상처, 구멍, 주름, 기생충의 흔적 등 세밀한 검사를 통해 가죽의 등급과 용도가 결정되면 장시간 숙성을 위해 전용 보관실로 이동된다.

에르메스가 유명한 이유는 ‘좋은 가죽’ 때문이기도 하지만 좋은 가죽을 완성시키는 손길이야말로 최고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비상하면서도 민첩한 손의 움직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에르메스는 ‘사람의 손’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에르메스의 필수 3요소는 가죽을 꽉 물어서 자국을 남기는 그리드, 바늘이 들어갈 구멍을 만드는 아주 얇은 다이아몬드형 송곳, 한 쌍으로 이루어진 뭉툭한 바늘인데 이러한 도구들과 장인의 손길이 만나 비로소 균일한 스티치와 정교한 바느질이 완성되는 것이다.


150년 전과 동일한 도구들이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도구들은 만년필처럼 사용하는 장인의 스타일대로 모양을 갖추게 된다.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에는 안장과 마구 제작으로 시작된 에르메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밀랍을 입힌 실과 양 끝에 달린 바늘을 통한 바느질로 두 장의 가죽은 견고함 그 자체가 된다.

가방, 벨트, 장갑, 시계의 스트랩 등 가죽제품에 이 기술이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도 손잡이, 거셋(덧천), 잠금장치, 포켓과 같이 튼튼함이 더욱 많이 요구되는 부분에 사용되며 2.5cm당 적게는 5번, 많게는 14번의 스티치가 이루어진다. 이 스티치를 위한 수작업은 수개월의 훈련과정을 거친 장인의 손과 특정한 도구에 의해 완성되며 이는 ‘에르메스의 아이덴티티 코드’로 자리 잡기도 했다.

실에 밀랍을 입힌 것은 방수처리와 강화기능, 부드러움을 위한 것으로 뛰어난 치수안정성으로 유명한 리넨 실위에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습한 일본에서도 늘어나지 않고 춥고 습한 노르웨이에서도 줄어들지 않아 어떠한 기후에도 적합하다고 평가받는 이 실의 색상은 자그마치 백여 가지. 150m에서 600m에 이르는 다양한 컬러와 길이의 실에는 모두 색상번호가 달려있다.

에르메스의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의 에르메스 가죽장인 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만 하는데 현재 이렇게 엄격한 교육과정을 통과한 에르메스의 장인들은 500여 명으로 현재는 80여 명의 예비 장인들이 에르메스 장인 학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이들의 법정 근로시간이 33시간이고 가방 한 개 당 걸리는 제작시간이 18시간이니 장인 한 사람이 일주일에 만들 수 있는 가방의 개수는 두 개도 되지 않는다.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에르메스 가죽 제품에는 제품을 만든 장인의 사인 이외에 제작년도와 데스크 번호가 새겨지는데 철저한 AS로도 잘 알려진 에르메스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있다.

고객이 수선이나 부분 교환을 원할 경우 바로 이 데스크 번호가 이용되는 것. 제품에 적힌 데스크 번호는 정확한 제품의 탄생 지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일치하는 번호의 데스크로 옮겨져 제품을 만들었던 장인에 의해 수선이 이루어진다.

최초의 제품 제작 시 차후에 있을지 모르는 수선을 위해 연도별, 종류별, 색상별로 가죽을 보관하는데, 부분 교체시 제품에 새겨진 제작년도를 보고 가장 비슷한 시기의 가죽을 사용한다.

제품이 생산되는 프랑스 이외의 국가에서 제품 수리를 의뢰할 경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는데 이젠 이러한 불편까지도 줄일 수 있게 됐다. 바로 국내의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에르메스의 장인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1837년 마차를 위한 용품 제작으로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가죽 제품의 역사를 이뤄온 에르메스. 최상의 재료와 최고의 장인정신을 우선시하는 에르메스의 철학에는 ‘사람’을 존중하는 인간중심의 사상이 담겨있다.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고 연륜이 쌓인 한 사람보다 젊고 새로운 인력을 선호하는 현대 사회의 추세와 반대되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둘도 없는 최고의 명품을 탄생시켰다. ‘오랜 역사와 명성’을 대표하는 에르메스. 시간과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정신과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는 장인의 손길이 이루어 낸 결과물은 만물이 ‘디지털화’되는 현대 시대에 더욱 빛을 낸다.

<에르메스 가죽 사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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